
6월 13일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선거가 있었다. 3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지역주의가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이른바 보수가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격변이라 하겠다. 반대로 진보진영은 유례없는 압승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국내외의 반응과 평가가 쏟아졌다. 전통적인 보수층 지지자들은 경악과 우려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입에서 진보와 보수는 좌와 우로 등치 된다. 그래서 진보의 승리는 곧 좌파의 집권과 동일한 표현이 된다. 전통적으로 좌파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칭하는 말이었음을 고려하면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라는 딱지는 다수의 시민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흑백논리와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그렇기에 이런 흑백논리의 프레임을 깨트린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우리 사회가 낡은 냉전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막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음험한 좌우 개념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더 보편적이고 중립적으로 사용하는 진보와 보수 개념을 다시 정의해 보자.
보수와 진보의 말뜻은 뭘까?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보수란 급격한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의 옹호와 현상 유지 또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고방식 또는 그런 경향이나 태도를 뜻한다. 진보란 1. 사회의 모순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사고방식 또는 그런 경향이나 태도 2. 인간의 정신, 문명, 역사 따위가 시간을 따라서 나아지고 발전한다고 하는 신념이라고 한다. 이런 사전적인 정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크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이 보수의 몸통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은 과연 진보인가? 그러면 정의당이나 녹색당과는 어떻게 얼마나 다르지? 바른미래당은 보수일까? 중도일까?
카의 역저 『역사란 무엇인가』 5장의 제목이 ‘진보로서의 역사’다. 이 장에서 카는 진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아울러 이 글을 읽으면서 사회적인 진보와 생물학적 진화 개념 간의 중대한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 목적론적 역사관 그 후 근대 역사 기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계몽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유대교적 기독교적인 목적론을 계속 지켜왔습니다만, 그 목표를 현세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적 과정 자체의 합리적인 성격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역사는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 모습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적인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진보인가 판단하는 것의 어려움 생물적 진화와 사회적 진보 그러나 이것은 자연에서 진화의 근본인 생물적 유전과 역사에서 진보의 근원인 사회적 획득을 혼동하는 것이기에 점점 더 오류를 낳게 됩니다. 유전에 의한 진화는 몇 천 년이나 몇 백만 년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사 이래 인간에게는 아직도 이렇다 할 생물학적인 변화는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획득에 의한 진보는 인간의 각 세대를 단위로 하여 측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부정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 진보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 역사의 진보는 명백히 규정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관념은 19세기의 사상가들이 자주 가정했던 것입니다만 이런 견해는 부당하고 쓸모가 없습니다. 진보를 믿는 것은 결코 자동적이고 불가피한 어떤 과정에 대해 믿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보라는 말은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적은 역사 진행 과정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에서만 비로소 규정할 수 있고, 유효성도 달성과정에서만 비로소 증명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한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다면 사회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 모든 사회가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는지 나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5장 「진보로서의 역사」 |

이 달의 미션
배경지식 코너에서 다룬 주제와 관련된 논제를 살펴보자. ‘사회가 과연 진보하는가?’, ‘무엇이 진보의 기준인가?’는 분분한 논란의 단골 메뉴라고 하겠다. 이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 예컨대 한병철의 『피로사회』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같은 관점에선 물질문명의 비대화와 가속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시민들의 인권이 억압받거나 불평등이 큰 사회에 대해선 후진적인 정치 시스템의 개선 곧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당연한 것으로 요청되기도 한다. 그러니 제시문을 꼼꼼히 읽고 출제자가 수험생들로 하여금 성찰하길 바라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선입견에 따른 상식적인 응답은 때로 ‘준비된 답안을 암기’했다거나 출제자의 기대와 동떨어진 오답으로 치달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 다윈은 자연에서도 한 생물 종의 많은 개체들 가운데 환경에 잘 적응하는 특성을 가진 개체들만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개체들이 경쟁을 통해 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번식에 성공함으로써 선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물리적 환경 조건 또는 개체들 사이의 경쟁은 특정 형질만을 선택하여 생물의 진화가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기원’은 모든 생물체가 원시 유동체나 살아 있는 분자로부터 유래한 과정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한 생물 종이 다른 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다윈은 궁극적인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해석은 과학적문제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에 대한 논의는 자연에 많이 존재하고, 쉽게 관찰되는 생물의 변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은 생물의 변화가 일어나는 진화라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을 설명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다윈은 생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진화의 기적을 자연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바로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나) 진보의 개념은 수백 년 동안 그림자처럼 존재해 오다가 마침내 산업혁명 시대에 서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35년 매콜리의 연설 한 대목을 들어 보자. “우리는 진보의 편에 섰습니다. (……) 영국의 역사는 결단코 진보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진보의 행진이 증기기관과 연소 엔진을
달고 박차를 가하던 저 시대에 매콜리는 소리 높여 외친다.
이것은 이동의 속도를 높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거리의 제한을 없애 주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비즈니스의 신속한 처리를 원활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저 깊은 바다 속까지 내려가고, 하늘 높이 날고, 땅속 깊이 유해한 구석까지 안전하게 파고들고, 마차가 없어도 자동차로 대지를 누비고, 바람을 가르며 시속 10노트로 달리는 배로 바다를 횡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것은 결코 휴식을 모르고 결코 도달할 수 없고 결코 만족을 모르는 철학입니다. 이 법칙이 바로 진보입니다.
그리고 한쪽 모퉁이에서 『종의 기원』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859년에 발간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끝을 맺는다. “오직 각 종(種)의 선(善)에 의해서 그리고 선(善)을 위해서 자연의 선택은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신체적·정신적인 천부적 자질은 완성을 지향하며 진보해 나갈 것이다.”
(다) 19세기의 사회과학자들은 사회를 성장 과정에 있는 일종의 유기체로 보았다. 이 유기체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하고 조직적인 것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일반성에서 특수성으로 성장한다. 사회의 성장 과정은 몇 개의단계로 구분되며 시작과 최종적 목표를 가진다. 이러한 사회의 성장이 곧 사회의 진보이며, 더 새롭고 더 진화된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저명한 인류학자 타일러(E. B. Tylor)와 모건(L. H. Morgan) 같은 이들은, 인간이 사용한 기술과 도구의 수준에 따라, 인간의 역사를 미개ㆍ야만ㆍ문명의 시기로 나누고, 인간의 역사는 ‘위로 발전해 나가는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고정된 인류의 성장 단계상의 위치에 따라 각 문화들을 분류하고 성장의 양식과 메커니즘을 설명해 주는 척도를 고안하였다. 이들의 작업에는 세 가지 기본 가정이 전제되어 있었다. 첫째, 현존하는 사회들은 더 ‘원시적인 것’ 또는 더 ‘문명화된 것’으로 분류되고 등급이 매겨질 수 있다. 둘째, 원시 사회와 문명사회 사이에는 정해진 몇몇 단계가 존재한다. 셋째, 모든 사회는 속도는 상이하지만 동일한 순서로 이들 단계를 밟으며 진보한다.
이들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사회적 복잡성의 증가 또는 지적, 종교적, 심미적 세련의 정도에 따라 진보를 측정하려 하였다. 물론 그들은 인류 역사상 벌어졌던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보는 엄연히 존재하고 시간은 결국 인간에게 이로운 개념이라는 사상이 그들 마음 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나아가 진화의 방향을 알 수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펜서는 진화는 종들을 더 길고 더 편안한 삶으로 그리고 자손들을 더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사명은 이러한 가치들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서로 협동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방법이었다. 더 멋지게, ‘영구적으로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 말이다.
(라) 다음은 어느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나눈 대화의 일부입니다.
A: 진화의 전체 흐름을 보면 단순한 생물들이 우리처럼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화해 왔으니 당연히 어떤 형태의 진보 개념을 상상할 수도 있겠죠. 이 문제를 한 마디로 해결하기는 상당히 어려워요. 예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소진화와 대진화를 나눠서 이야기하는데요, 소진화는 유전자 수준에서 벌어지는 변화고, 대진화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커다란 현상들을 말합니다. 소진화를 이야기할 땐 사실 별 문제가 없어요. 소진화에는 ‘진보’ 개념이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유전자가 뇌를 가진, 생각하는 존재도 아니고, “유전자들아, 우리 좀 더 잘해 보자!” 이럴 리도 없다는 거죠. 유전자들 간의 갈등과 경쟁 사이에서 돌연변이도 생기고 모두가 우연투성인데 거기서 무슨 ‘진보적인’ 방향을 잡겠어요. 그러나 이런 소진화의 단계를 거쳐서 대진화로 넘어가면 문제가 결코 단순한 게 아닙니다.
이건 생물학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자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은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 학문이잖아요. 쪼개고 쪼개서 부분을 보고 그 부분들로 전체를 끼워 맞추는 학문이죠. 그런데 생물학은 그렇지 않잖아요. 분자에서 단백질로, 단백질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생명체로 하나의 단계를 밟아 올라갈 때마다, 환원주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개입하고 구성 부분의 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B: 복잡성의 영역에 들어오면 ‘진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결코 말할 수 없다, 좋은 얘깁니다. 생명체의 진화 못지않게 복잡한 것이 인간의 역사인데, 그 역사라는 것에 진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곧장 ‘마르크시즘’을 연상하죠.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란 것이 인간 사상계에 등장한 역사는 겨우 200년 안팎입니다. 진보 사상을 띄워 올린 것은 근대 과학과 계몽철학이죠. 과학, 이성, 합리적 기획을 합치면 인간 사회는 ‘진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근대 이데올로기죠. 거기에 불행하게도 정치 제국주의가 결합하였습니다. 진보라는 것이 어떤 주어진 방향이나 목표를 향한 역사의 필연적 진행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역사에 진보가 있는지 없는지는 저도 선생님의 표현대로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진보했는지 어떤지는 그 역사라는 것이 끝나는 지점에서만 알 수 있겠죠. 저는 그때까지 살 생각이 없어요.(하하하)
논제 해설
이 논제는 전형적으로 진화나 진보 개념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길 요청한다. 엄격히 말해 생물학적으로도 진화는 진보와 동일하진 않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현대 생물학의 진화 개념은 생물들 간의 우열을 부정한다. 자연선택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각 생물들이 성공적으로 적응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기초할 때, 생물의 진화는 진보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선택에서 인간 사회의 자동적인 진보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적인 약점이나 야만적 관행의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시민 사회의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견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래의 예시답안을 보면서 출제자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느껴보기 바란다.
예시 답안
| <그림>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생물의 종들이 유전적으로 한층 더 복잡하고 다양한 종으로 분화되어 왔음을, 글(가)는 이러한 종의 분화와 진화가 경쟁, 적응, 자연 선택의 필연적인 과정임을 명하고 있다. 이러한 생물계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진화론은 인간 사회의 역사와 문명을 설명하는 ‘진보’ 개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글(나)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을 주도한 서구인들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음을, 글(다)는 그러한 확신과 더불어 인간 사회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진보적 관점이 진화론적 가설로 정립되어 갔음을 각각 보여 주고 있다. 인간 사회는 보편법칙에 따라 일련의 단 글(라)는 이러한 ‘진보’ 개념과 이론의 확산에 19세기 과학 문명의 발달과 계몽 철학의 발흥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음과 아울러 그것이 초래한 현실적인 문제점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글(라)의 지적처럼 생물 진화의 차원에서는 진화가 곧 진보는 아니다. 그런데도 진보와 진화를 동일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생물학적 차이를 우열 판단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인류를 다른 생물 종들보다 우월하다고 보거나, 민족이나 인종 간의 우열을 따지거나 사회적 소수자를 열등한 자로 재단하는 사고방식은 극단적으로 인종 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 역사를 단선적이고 궁극적지향점을 두고 발전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특정한 사회나 문명의 발전 경로가 여타 사회에도 통용될 수 있다고 보는 이론들은 19세기 서구 사회라는 특정 시간과 공간의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의식을 강화하여 ‘비서구에 대한 서구 우월주의’나 ‘타 인종에 대한 백인 우월주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진보’ 개념과 이론은 낡은 시대의 유물로 간주된다. 각 사회와 문화의 상태는 진보나 우열과 상관없는 진화와 차이로서 이해되어 가고 있다. 서구 기술 문명의 고도화가 인류에게 더 나은 상태를 가져다주었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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