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주의 목요에세이] 망각과 둔함의 미학

이승환

lsh@dhnews.co.kr | 2022-04-28 08:33:02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켜 말하라고…하지만 이 말처럼 지키기 힘든 말도 없을 듯하다. 특히 매일 얼굴 마주 보면서 내 잔소리 대상으로 만만한 가족들에게 가장 상처 주는 말을 잘하는 것이 사실이다.


맘은 그렇지 않은데, 원래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닌데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항상 먼저 소리 지르고 후회하고 악쓰고 싹싹 빌고 하는 악순환의 굴레를 못 벗어난다.


바로 오늘 남편에게 한바탕 저주와 같은 카톡을 날리고 후회하는 중이다. 헬스장에서 마스크 쓰고 땀 빨빨 흘려가며 뛰고 있는데 느닷없이 남편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어디 어디에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는 카톡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항목의 대부분이 나와 애들에게 들어가는 돈이었다. 앞뒤 전후 사정의 말 한마디 없이 갑작스럽게 식구들에게 들어가는 지출내역서 항목을 받고서 왜 이런 것을 보냈을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리스트를 보내는 의도는 돈 좀 아껴쓰라는 잔소리 대신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항목 대부분이 아이들 학비나 용돈이었고 내 항목으로는 약간의 건강 관련한 병원비와 용돈이 있었다. 아이들한테 들어갈 돈이 아까워서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이건 분명 나에게 들어가는 지출항목이 아까워서 그랬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왜 이런 항목을 보냈느냐는 이유를 먼저 묻지도 않고 서러운 생각에 난 그만 앞뒤 생각 없이 남편을 향해 카톡으로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우리가 돈 쓰는 것이 아까우면 다 환불하고 취소할게요’라고 하고는 화나고 삐진 모양의 온갖 이모티콘을 총동원하여 카톡으로 공격하였다. 나보다 남편의 톡은 좀 느려서 일방적으로 나의 공격만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그 공격 사이에 남편의 카톡이 더듬더듬 비집고 들어와 ‘주변 지인이 갑자기 사정이 힘들어지는 걸 보니까 갑자기 나도 걱정이 되어 점검을 해 본 것 뿐이야. 난 그냥 더 열심히 살자는 의미에서 보냈을 뿐인데 도대체 왜 그래?’라고 하고는 카톡이 끊어진 것이었다. 이를 어쩌나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어떻게 수습하지?


저녁 늦게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남편은 내가 수업 때문에 컴퓨터에 앉아 있느라 꼼짝 못하는 것을 힐끔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서 TV만 시청하고 있다. 수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머릿속은 끝나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수업 내용은 뒷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애들도 없는 적막한 집안 겸연쩍은 얼굴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꼼짝 않고 골프 채널에 눈을 박고 있는 남편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엉덩이를 착 붙이면서 몸을 기대고 애들도 없겠다 등에 손을 집어넣어 살살 긁어주면서 평소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목소리로 “왔엉? 수업하느라 몰랐넹”하면서 있는대로 콧소리를 넣어 말했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끝났어? 시원한 마실거 좀 줘”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땐 뭐든지 잘 잊어먹고 둔감한 남편의 성격이 최고다. 이러면 풀린거다. 기특한 남편 같으니라구……. 아직까지 화가 나 있다면 내가 옆에 가는 순간 벌떡 일어나 안방 침대로 가버리는데 등 긁어주니까 그냥 있는 것 자체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25년의 짬에서 나온 바이브랄까?


얼음 동동 띄운 결명자차를 보기에 시원하도록 유리잔에 담아 달그락거리며 가져다 주고는 열심히 어깨며 목을 주물러 주었다. 싸운 뒤에는 역시 스킨쉽이 최고다. 아무 말 없이 기분 좋은 듯 온 몸을 맡기고 있는 남편이 평소엔 얄밉지만 오늘 같은 날은 곰탱이처럼 귀엽다. 계속 주무르다보니 손이 좀 저리다. 아~ 자업자득이다. 다음부터는 절대 먼저 흥분하지 말아야지.


[ⓒ 대학저널.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