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노, 우주의 기운으로 그린 색면의 노래

강승형 기자

skynewss@nate.com | 2025-10-31 16:45:25

 금보성아트센터 제공

 

탁노(卓魯) 작가의 화면 앞에 서면, 우리는 색이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생명체의 맥박처럼 느껴진다. 그의 회화는 붓과 물감의 행위를 넘어선 ‘기(氣)의 회화’, 즉 존재의 기운이 색으로 피어나는 우주적 생성의 장(場)이다.

화면 위로 흘러내리는 색과 응고된 질감은, 자연의 순환과 인간 내면의 에너지가 교차하는 감응의 공간을 만든다. 탁노에게 색은 단지 미학적 장치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이자 ‘우주의 파동’이다. 그는 스스로를 화가가 아닌 “자연의 에너지를 통과시키는 통로”라 부른다. 그 말처럼 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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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노의 미학은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에 닿아 있다.


노자는 “도(道)는 늘 무위하되, 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라 했다. 탁노의 화면도 그렇다. 의도적으로 그려진 흔적보다, 물감의 흐름과 중력, 습도, 시간에 맡겨진 ‘자연스러운 생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그는 물감이 흘러내리며 스스로의 질서를 찾는 과정을 “우주의 숨결”이라 표현한다. 이때 작가는 ‘통제자’가 아니라 ‘관찰자’이며, 예술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자율적 운동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세계관은 동양의 산수화가 보여준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탁노의 화면은 산수의 구체적 형상 대신, 색과 물질, 질감이 스스로의 기운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산수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의 생성 과정’ 자체가 회화가 된 상태이다.

탁노의 작품은 한눈에 보아도 물감의 층위가 남다르다. 두텁게 쌓인 유화 물질은 지층처럼 세월을 품고, 그 위로 얇게 흘러내린 안료는 바람과 비, 그리고 생명의 호흡을 상징한다.

이러한 질감은 서양의 앵포르멜(Art Informel)이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연상시키지만, 탁노의 경우 그 물질성은 파괴나 격정이 아니라 ‘조화와 생명’을 지향한다. 물질은 해체되지 않고 살아 숨 쉬며, 생명의 파동으로 변환된다.

그의 화폭에는 ‘시간의 흔적’이 축적되어 있다. 여러 날, 여러 계절에 걸쳐 물감이 쌓이고 말라가며 자연스레 형성된 균열과 층위는, 회화가 시간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임을 증언한다. 탁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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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한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이 남긴 호흡의 기록이다.”

짙은 청색과 녹색이 화면을 덮고, 곳곳에 번지는 형광빛 초록이 생명의 맥박처럼 떨린다.
물감은 흘러내리며 바다와 숲, 혹은 우주의 심연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어떤 형상으로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숨’이라는 감각, 즉 살아 있음의 리듬을 느낀다.

표면 아래로 묻혀 있는 질감의 층들은 기억의 지층처럼 쌓여 있으며, 표면 위의 흘림은 그 기억 위를 흐르는 현재의 시간이다. 이 작품에서 탁노는 자연의 순환 — 생성과 소멸, 응축과 해방 — 을 색과 질감으로 완벽히 구현한다.

탁노의 대표작 〈적운의 정원〉은 전혀 다른 에너지로 작동한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붉은색과 오렌지색의 폭발은, 생명과 빛의 에너지가 극점에 달한 순간을 표현한다.

그의 붉음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불(火)’의 기운이다. 불은 파괴이자 창조이며, 죽음과 재생의 상징이다. 두터운 물감 덩어리들이 마치 불길의 잔재처럼 화면 위에 붙어 있고, 그 사이로 흰색과 검은색의 선이 흘러내리며 질서와 혼돈의 경계를 만든다.

이 작품은 우주의 기운 중 ‘양(陽)’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탁노는 색을 통해 존재의 양극, 즉 생성과 소멸, 빛과 어둠, 정(靜)과 동(動)의 상호작용을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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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노의 〈초록의 문〉 시리즈는 생명과 자연의 근원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 작품들은 화면을 덮은 초록의 층들 속에서 작은 형체들이 돋아나듯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식물의 세포처럼, 때로는 대지의 단면처럼 느껴진다.

이 시리즈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빛의 사용이다. 녹색과 청색 사이에 섞인 노란빛은 생명의 에너지, 즉 태양의 기운을 상징한다. 탁노는 이 빛의 흔적을 통해 자연이 스스로 피어나고 사라지는 ‘순환의 질서’를 시각화한다.

그에게 초록은 단지 자연의 색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잇는 통로’, 곧 ‘문(Gate)’이다. 화면 속의 초록은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잇는 길이며, 인간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상징적 통로다.

탁노의 회화는 서구의 색면추상(Color Field Abstraction)과 동양의 기운생동(氣韻生動) 개념이 하나로 융합된 ‘한국적 색면회화’의 정점에 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이 ‘정지된 명상’이라면, 탁노의 색면은 ‘움직이는 명상’이다. 로스코의 붉음이 인간 내면의 비극을 응시한다면, 탁노의 붉음은 생명의 열기를 노래한다. 또한 그의 물질적 질감은 서양 앵포르멜의 거칠음과는 달리, 비움과 순환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그의 작품에는 동양화의 여백 개념이 현대적으로 변주되어 있다. 흘러내린 색 사이의 ‘쉼표 같은 공간’이 바로 그것이다. 그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기운이 머무는 자리, 즉 ‘무위의 공간’이다.

탁노는 한국 현대미술의 큰 흐름 속에서 ‘감응적 추상(Responsive Abstraction)’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이전 세대가 산업화 이후의 물질적 앵포르멜을 추구했다면, 그는 생명과 자연, 우주의 순환을 중심으로 한 ‘생태적 색면회화’를 구축했다. 이는 단지 회화의 형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철학적 행위다.

그의 작업은 “회화는 다시 생명과 감응의 예술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서구의 개념적 미술이 사유를 중시했다면, 탁노의 회화는 감각과 생명의 진동으로 철학을 대신한다. 이 점에서 그는 ‘사유하는 화가’이자 ‘감응하는 존재’로서, 한국적 현대미학의 한 축을 세우고 있다.

탁노의 회화는 요약하면 ‘무위의 행위로 완성된 존재의 기록’이다.


그의 물감은 흘러내리고, 번지고, 응고되며 스스로의 질서를 찾아간다. 그 과정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연의 행위’이며, 그 결과로 탄생한 화면은 우주의 미세한 파동을 그대로 품는다.

그의 작품은 감각적으로는 격렬하지만, 그 깊이는 고요하다. 겉으로는 폭발하지만, 본질은 명상적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림을 보는 일’이 곧 ‘자연의 숨을 듣는 일’임을 깨닫는다.

탁노의 색면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우주의 언어이며, 그 물질적 표면은 존재의 기운이 머문 자리이다.

탁노의 작품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화면의 색들이 점점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을 쉰다. 청색은 바다의 심연으로, 녹색은 숲의 숨결로, 붉음은 태양의 맥박으로 변한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 스스로 그려내는 숨의 흔적이다.”

탁노의 회화는 그 답변의 실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색은 더 이상 물감이 아니라, 우주가 인간의 손끝을 빌려 그려낸 ‘기운의 풍경’이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흉내 내지 않고, 자연이 스스로 그려지게 두는 화가다. 그의 붓은 바람이고, 그의 물감은 시간이며, 그의 캔버스는 우주의 호흡이다.


글 금보성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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